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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이 더 맛있는 그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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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글보글 끓는 추억의 맛
만화방과 라면

 

라면이 더 맛있어지는 조리법이 제각각이듯이, 라면을 유독 맛있다고 느끼는 장소도 저마다 다릅니다. 누군가는 학교 앞 분식집을, 누군가는 낚시터를, 누군가는 캠핑장을 라면의 성지로 꼽는데요. “인생에서 쓸 집중력에 총량이 있다면 만화방에서 다 썼을 것”이라고 말하는 만화 마니아에겐 만화방 라면만큼 강렬한 힐링푸드가 없는 듯합니다. 날 저무는 줄 모르고 만화 삼매경에 빠졌던 어린 시절, 그러다 맹렬한 허기가 찾아오면 한 그릇 뚝딱 해치웠던 라면 한 그릇.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라면은 ‘만화방 라면’이라고 말하는 박사 작가가 추억의 맛을 소환합니다.

만화방을 학교보다 더 자주 가던 시절이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학교에 간다고 가방 챙겨 나선 뒤에 망설임 없이 만화방으로 등교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박력이 어디서 나왔나 싶은데, 그 결단력 덕분에 초등학교 시절에 배워야 할 모든 것을 만화책에서 배웠다. 생각해보면 그 이른 시간에 문 연 만화방이 있었다는 것도, 초등학생이 학교 안 가고 만화를 보는 데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는 것도 신기할 뿐이다. 그런 걸 시절인연이라고 해야 할까. 그나마 중학교 때는 철이 좀 들었던 덕에 학교는 갔다. 끝나고 바로 만화방으로 직행했을 뿐. 이사를 자주 다닌 편이었는데 이사 가는 곳마다 가장 먼저 만만한 만화방을 찾았다. 그리고 ‘순정만화’가 잘 구비되어 있는 밝은 만화방을 찾으면 그곳에 둥지를 틀곤 했다.

미지의 세계와 만나는 상상의 방

만화방은 오감을 자극하는 곳이다. 흑백의 평면 이미지들을 후루룩 넘겨보는 것뿐인데도 어찌나 생생하게 이미지가 떠오르는지, 총천연색 영화가 상영되는 극장에 가는 것 못지않다. 특히 음식 만화가 유행했던 시기에는 식욕도 함께 폭발하곤 했다. 최선을 다해 감각적 공감을 일으키려는 작가들의 노력 덕분이다. 그때 흘러들어오는 한 줄 라면 냄새. 그보다 더 자극적이기는 어렵다. 만화방에 다녔던 분들이라면, 한 명이 라면을 시켜서 먹기 시작했을 때 여기저기서 들려오던 “아저씨~” 소리를 기억할 것이다. 라면의 가장 강력한 홍보대사는 역시 ‘라면 냄새’다.
사실 어디서든 라면을 맛없게 먹기는 힘들다. 요리하는 사람의 실력에 크게 좌우되지 않고 기대하는 맛을 내주는 것이 라면이니까. 그렇지만 맛있는 라면의 성지로 만화방, 피씨방, 한강을 꼽는 의견은 반대할 수가 없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내가 그나마 잘 아는 만화방 라면이 맛있는 이유는 몇 가지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양수겸장 가능한 만화방 대표 메뉴

첫 번째 이유는 배고플 때 먹기 때문이다. 만화는 한번 잡으면 손에서 놓기 어렵다. 한 권 읽고 나면 다음 편이 너무나 궁금해져서다. 보통은 배고픈 것도 잊고 보기 마련이라, 배고픔을 깨닫게 되면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상태다. 배고플 때는 뭔들 맛이 없으랴마는 심지어 라면 아닌가. 더구나 배고픔을 깨달은 후 몇 분 내에 먹을 수 있는 것도 큰 장점이다.
두 번째 이유. 라면은 ‘양수겸장’을 가능하게 해 준다. 한 손에 만화를 들고 또 한 손에 젓가락을 들고, 눈을 만화에 둠과 동시에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다. 이럴 때 라면은 최상의 맛을 낸다. 보통 라면과 함께 반찬으로 단무지나 김치를 먹지만, 최고의 반찬은 역시 만화반찬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만화방 라면은 ‘꼬들한 면발’이 중요하다. 만화에 정신이 팔려서 퍼지면 안 되니까. 만화를 보다가 라면이 불어버려서 다 못 먹는 상황은 만화방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
세 번째로 꼽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라면 끓이는 기술일 것이다. 배고플 때 먹는 라면, 남이 끓여준 라면이 맛있다는 말은 진리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만화방 라면의 맛의 비밀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은 인터넷의 시대. 그곳은 온갖 비밀이 유출되는 곳 아니던가. 만화방 라면 끓이는 비법도 검색 몇 번으로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꼬들꼬들 맛을 내는 업소 비책

유일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만화방마다의 개성도 있고, 사람들 입맛도 다 다르다. 어떤 이는 무조건 센 불에 팍팍 끓여야 한다고 하고 어떤 이는 약한 불에 뚜껑 닫고 은근하게 익혀야 한다고 한다. 어떤 이는 계란을 푼 것을 좋아하고 어떤 이는 노른자가 살아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떤 이는 영업용 화력 좋은 가스렌지 덕분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휴대용 가스렌지와 인덕션만으로도 그 맛이 난다고 반박하기도 한다. 그래도 대부분 인정하는 만화방 라면 레시피는 이렇다. 재료는 간단하다. 라면과 달걀 반 개, 파만 있으면 된다.
1. 일단 물을 끓인다. 끓인 물에 스프를 넣고 휘저은 뒤 면을 넣고 센 불에서 2분쯤 끓인다.
2. 2분이면 면이 아직 다 안 익었을 것이다. 개의치 말고 면만 건져내어 그릇에 담아라.
3. 냄비 속에서 아직 끓고 있는 라면국물에 송송 썬 파 반 줌과 풀어놓은 달걀 반 개를 넣고 다시 한번 부르르 끓인다.
4. 끓인 국물을 그대로 면에 부어준다. 아직 덜 익은 면에 끓는 육수가 부어지면서, 꼬들하면서도 적당히 익은 면발이 완성된다.

사실 이런 음식에는 재료를 많이 넣는 것이 오히려 맛을 떨어뜨린다. 라면 고유의 맛을 잘 살리면서도 적당히 맛을 더하는 정도가 입맛에 맞다. 그렇지만 몇몇 재료는 시험해봐도 좋을 것이다. 마늘, 청양고추, 참깨, 고춧가루, 간장 한 스푼 등. 몽땅 넣지는 마시라. 그리고 이것은 비밀 중의 비밀이라고 하는데, 적당한 때에 슬쩍 풀어 넣는 설탕 반 스푼이야말로 만화방 라면 맛의 결정적인 비법이라고.

가늘게, 그러나 강력하게

요즘의 만화방은 세련되어도 너무 세련되었다. 라면 말고도 다양한 음식들이 식당 못지않게 잘 요리되어 나온다. 작은 만화방에서는 겨우 컵라면이 비치되어 있지만, 어떤 만화방은 인공지능으로 기계가 조리해주는 만화자판기가 자리 잡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역시 만화방 라면은 직접 손으로 끓여주는 맛 아닐까. 그 맛은 만화방에 드나들었던 모든 이들의 DNA에 새겨져서, 아무리 만화방이 고급스러워진다 해도 라면이 메뉴에서 사라지는 날은 없을 듯하다.
언제부터 만화방에 발길을 끊었을까. 기억나지 않는다. 만화가 재미없어져서 일리는 없고, 현생에 만화같은 일이 너무 많이 벌어져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어렸을 때 다녔던 만화방은 여전히 내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때 맡았던 라면 냄새가 그립다. 총천연색으로 펼쳐진 상상의 세계에 가늘게, 그러나 강력하게 스며들던 욕망의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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